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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저그런얘기

초등학교 4학년 때의 기억

뜬금없이 옛날 기억이 떠오를 때가 있다.

 

3학년 때 이사도 안 했는데 학교 수용 인원 문제로 전학을 갔었다. 전학간 학교 애들은 먼저 학교 애들보다 좀 과격하고, 욕도 많이 썼다. 아마도 그 학교에 오는 애들의 상당수가 달동네, 또는 재래시장 근처에 사는 아이들이어서 꽤나 거칠었던 기억이다. 거기서 생전 처음으로 얼굴에 주먹을 맞아 봤고, 쌍욕도 처음 들었었다.

 

어쨌든 그렇게 일 년을 약간의 혼란 속에서 보내고, 4학년이 되었다. 처음 등교해서 운동장에서 줄 서 있는데, 작은 여자애 하나와 입씨름이 붙었다. 내용은 기억 안 나는데 좌우간 그 여자애는 목소리도 아주 카랑카랑하고 당당하게 내 잘못을 따졌던 것 같고, 난 당황해서 제대로 대응을 못 했던 것 같다. (아마도 내가 사소할지언정 뭔가 잘못했었을 거다.) 여자애 이름은 주연이었다. 이주연. 얼굴은 기억이 잘 안 나고, 키가 좀 작고 빨간색? 핑크색? 스웨터를 입었던 모습만 어렴풋이 남아 있는데 아마 확실치는 않다. 다른 애랑 헷갈리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.

 

그리고 얼마 안 있어 반장을 뽑는데 주연이가 반장이 됐다. 당시만 해도 남자애들은 남자에게 투표하고 여자애들은 여자에게 투표하는 게 보통이고, cross vote를 하다가 알려지면 동성 친구들 내에서 찐따 되는 분위기였다. 근데 반에 여자애가 한두 명쯤 많았던가, 그랬는데 그게 결정적 이유였는지는 확실친 않다. 그 땐 우선적으로 공부 잘하는 애들이 후보가 되고 그 중에서 반장 하는 문화였으니 아마 주연이도 반에서 1~2등 했겠지. 이후로도 공부 잘 했던 걸로 기억한다.

 

여튼 남자애들은 여자 반장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였다. 그런 분위기 때문에 나중엔 남자반장 여자반장을 따로 뽑기도 했던 것 같은데, 일단 그 해 1학기에 반장은 주연이 하나였던 것 같다. 자기를 인정하지 않는 억센 남자애들과 맞서느라 주연이는 꽤 힘들었을 거다. 그래도 예의 그 당당함을 잃지는 않았던 것 같고, 나는 그런 주연이를 동경했었던 것 같고 조금은 좋아하기도 했던 것 같다. 하지만 별로 서로 대화를 하진 못했는데 아마도 내가 숫기가 없어서 여자애들하고는 잘 얘기를 못했던 게 이유였겠지. 그렇게 1학기가 가고, 2학기가 되어서 이번엔 내가 반장이 되었다. 나름 그것도 계급이라고 반 친구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은 달라지는 걸 느꼈었다. 나도 조금은 우쭐했던 것 같다. 

 

2학기가 시작하고 한 달쯤 지나서였나, 또다시 새로 생긴 학교-신봉초등학교-로 전학을 가야 되게 되었다. 이사는 전혀 안 했는데 초등학교를 세 군데 다니게 된 거다. 은천은 어쨌든 당시 꽤 오래 된 학교였지만, 신봉은 완전히 새로 생긴 학교라 4학년 우리가 가장 윗 학년이고, 5학년 6학년은 없는 곳이었다. 한 반에서 대략 열 댓 명쯤이 전학 대상이었던 듯 싶다.

 

그 때 담임 선생님 성함은 한봉상 선생님. 나이 지긋한 아줌마 선생님이었는데, 수업 시간엔 심심찮게 매를 드는 꽤나 무서운 분이셨지만 학교 밖에서 마주치면 자상하신 분이었다. 그 이중적인 면이 약간 충격이기도 했었는데... 기억나는 건 국민교육헌장 외워오기 숙제를 내고, 틀리면 틀리는 만큼 손바닥을 때렸었다. 난 미친듯이 순발력으로 외워서 아마 한 대도 안 맞았던 것 같다.

 

여튼 그 선생님이, 전학가는 아이들 다 앞으로 나오라고 하고 몇 마디 덕담을 하신 후, 그동안 같이 공부했던 친구들과 모두 인사하라고 해서, 분단 사이를 가로질러 가며 모두와 악수를 하는 시간이 있었다. 당시는 한 책상에 남녀가 짝으로 앉는 구조. 네 분단이니까 1분단과 2분단 사이로 교실 뒤쪽으로 갔다가 3분단과 4분단 사이로 해서 다시 교실 앞으로 돌아오는 코스였는데, 주연이는 1분단 창가쪽, 앞에서 두 번째 쯤에 앉았었던 것 같다. 좌우간 당시만 해도 남자는 남자들끼리 여자는 여자들끼리만 노는 문화여서, 애들이 악수하면서 뒤로 가는데 전부가 남자는 남자하고만, 여자는 여자하고만 악수를 하는 거다. 난 고민했다. 아 난 여자애들하고도 악수하고싶은데... 근데 괜히 또 튀기는 껄끄럽고 그래서 고민하다가 결국 내 차례가 왔는데, 도저히 부끄러워서 여자애들하고 악수를 못 하겠는 거다... 하는 수 없이 남자애들하고만 악수하면서 지나치는데, 주연이가 내게 잘 가라고 말을 걸었다! 아 이거 말까지 걸어 줬는데 악수를 청해야 하나... 지금 같으면 전혀 거리낄 거 없이 포옹이라도 기꺼이 했겠지만, 그 땐 그게 왜 그리 부끄러웠는지. 왜 남들 시선을 그리 신경썼는지... 그냥 지나치고 나서 너무나 후회했었다. 지금 생각해도 후회된다. 결정적으로, 나보다 몇 순서 뒤에 다른 남자애가 있었는데 걘 주연이하고 악수를 하더라! 이런 젠장... 애들이 약간 야유 비슷한 걸 보내긴 했지만 그게 뭐 어때서. 이별하는 마당에 그거 가지고 문제삼을 애들이 누가 있느냐 말야. 난 너무 어렸고 너무 소심했던 거다. 내가 반장인데, 그냥 악수해버리고 몇 마디라도 작별 인사를 했으면 좋았을걸... 아마 난 부끄러워서 주연이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었던 것 같다.

 

그렇게 짧은 시간이 지나가고, 운동장으로 나간 후 우리 반 남자애들은 반장이 간다고 예우한답시고 나를 무려 헹가래씩이나 쳐 줬다. 기분은 좋았는데 난 그래도 지나가버린 악수하는 시간을 후회하고 있었다. 하교하면서 주연이가 어디 있나 하고 뒤돌아본 것 같기도 하다. 하지만 하교 시간엔 아이들이 워낙 많아서 누굴 찾기란 어려운 법이다. 그 이후로 주연이를 본 기억은 없다.

 

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 나중에 아이러브스쿨이 뜰 때 몇 번 찾아봤지만, 이주연이란 이름도 흔하거니와 은천초등학교 이주연은 검색이 되지 않아서 찾을 수가 없었다. 혹시나 해서 방금도 찾아봤지만 안 나온다. 구글 검색하면 이명박 딸 이주연만 나오고 재수없게시리. 꼭 한번 만나 보고 싶은 친구인데. 이주연! 그 땐 미안했다! 실은 나 너 쫌 좋아했었어!

 

아직도, 그 마지막 인사하던 그 날, 교탁 위에 서서 바라보았던 주연이 모습과, 창가에서 내리쬐던 햇볕, 악수를 할까말까 고민하던 내 바보같은 모습이 기억이 난다.